두 차례의 성육신의 의의는 왜 완전케 하였다고 할 수 있는가?

2019. 6. 3. 05:40전능하신 하나님 교회 천국 복음/성육신

왜 두 차례의 성육신은 성육신의 의의를 완전케 하였다고 하는가?

두 차례의 성육신의 의의는 왜 완전케 하였다고 할 수 있는가?

성경 참고: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 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번째 나타나시리라” (히 9:28)

   관련된 하나님 말씀:

   『첫 번째 성육신은 사람을 죄에서 속량하였는데, 예수의 육신으로 사람을 속량한 것이다. 즉, 사람을 십자가에서 구원한 것이다. 하지만 사탄의 패괴 성정은 여전히 사람 안에 존재한다. 두 번째 성육신은 더 이상 속죄제가 되지 않고, 죄에서 속량해 온 사람들을 철저히 구원한다. 그리하여 죄 사함을 받은 사람들로 죄에서 벗어나 완전히 정결케 되고, 성정이 변화되어 사탄의 흑암 권세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돌아오게 한다. 이래야만 사람이 완전히 성결해지는 것이다. 율법시대가 끝난 뒤에, 은혜시대부터 하나님은 구원 사역을 시작하였는데, 말세에 인류의 패역을 심판 형벌하는 사역을 하여 인류를 완전히 정결케 한 다음에야, 하나님은 구원의 사역을 끝마치고 안식에 들어간다. 그러므로 3단계 사역 중, 두 차례만 성육신으로 친히 사람들 가운데서 역사하였는데, 그것은 3단계 사역 중 한 단계만 사람의 생활을 이끌어 주는 사역이고, 나머지 두 단계 사역은 모두 구원하는 사역이기 때문이다. 오직 하나님이 성육신해야만 사람과 함께 생활하고, 인간 세상의 고통을 겪을 수 있으며, 정상적인 육신으로 살 수 있다. 이렇게 해야 피조된 사람에게 필요한 실제적인 도를 공급할 수 있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의 모든 구원의 은혜를 받은 것은 하나님의 성육신으로 말미암은 것이지, 사람이 간구하여 하늘로부터 직접 받은 것이 아니다. 사람은 모두 혈기에 속하고, 하나님의 영을 볼 수도 없고, 더욱이 접근할 수도 없기 때문에, 사람이 접촉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말씀으로 된 하나님의 육신이다. 이런 것을 통해야만 사람은 모든 도와 진리를 깨닫게 되고, 모든 구원의 은혜를 받게 된다. 두 번째의 성육신은 사람의 죄를 제거하기에 충분하고, 완전히 정결케 하기에 충분하다. 그러므로 두 번째의 성육신은 하나님이 육신에서 하는 모든 사역을 끝마치고, 하나님이 성육신 된 의의를 온전케 하였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성육신의 심오한 비밀 (4)>에서 발췌

   『예수가 역사할 때에는 사람들은 여전히 예수에 대해 막연하고 모호하게 알고 있었다. 사람들은 계속 그를 다윗의 자손으로 여겼으며, 대선지자, 사람의 죄를 속량하는 인자한 주님이라고 하였다. 어떤 이들은 믿음으로 그의 옷자락만 만져도 병이 나았고, 소경도 볼 수 있게 되었고, 죽은 자도 살아날 수 있었다. 하지만 사람은 사람 안에 깊이 뿌리박힌 사탄의 패괴 성정을 발견할 수 없었고, 어떻게 벗어 버려야 하는지도 몰랐다. 사람은 많은 은혜를 받았는데, 예를 들면 육체의 평안과 희락을 누리고, 한 사람이 주를 믿으면 온 가족이 복을 받으며, 병이 낫게 되는 등등 이런 것이다. 그 외에 사람이 선행을 좀 하고 겉으로 보기에 경건하게 살아갈 수 있으면 합격된 신도였고, 이런 신도라야 죽은 후에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데, 바로 구원을 얻은 것이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은 생전에 생명의 도를 전혀 깨닫지 못하였고, 죄짓고 자백하는 것만 반복할 뿐, 성정 변화의 길은 없었다. 은혜시대 사람은 바로 이런 정형이었는데, 그런 사람이 완전히 구원을 받았겠느냐? 받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그 단계 사역이 끝난 후에는 또 한 단계 심판, 형벌의 사역이 있는 것이다. 이 단계는 말씀으로 사람을 정결케 하여 사람에게 행할 길이 있게 하는 것이다. 이 단계에서도 귀신을 쫓아낸다면 그 사역은 효과도, 의의도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은 죄성을 벗어 버릴 수 없고, 죄 사함을 받은 기초에만 머물게 되기 때문이다. 속죄제로 사람은 이미 죄 사함을 받았다. 그것은 십자가의 사역이 이미 끝났고, 하나님이 이미 사탄을 이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람에게는 아직 패괴 성정이 존재하여 여전히 죄를 짓고 하나님을 대적할 수 있기에, 하나님은 결코 인류를 얻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이 단계에는 말씀으로 사람의 패괴 성정을 드러내어 사람으로 적합한 길을 따라 실행하게 한다. 이 단계에서 하는 사역은 앞 단계보다 더욱 의의가 있고, 앞 단계에서 한 사역보다 효과가 더욱 크다. 왜냐하면 지금은 말씀으로 직접 사람에게 생명을 공급하여 사람의 성정을 완전히 새롭게 바꾸는 더 철저한 사역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마지막 때의 성육신은 하나님이 성육신 된 의의를 완전케 하였고, 사람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경영 계획을 철저히 완성하였다고 한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성육신의 심오한 비밀 (4)>에서 발췌

   『성육신의 의의는 평범한 정상 사람이 하나님 자신의 사역을 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이 인성에서 신성의 사역을 하는 것으로 사탄을 패배시키는 것이다. 말씀이 육신 된 것은 하나님의 영이 육신이 된 것인데, 바로 하나님이 육신이 된 것이다. 육신이 하는 사역은 바로 영이 하는 사역이다. 영이 하는 사역은 육신에 실제화되어 육신을 통해 발표된다. 하나님이 거하고 있는 육신 외에는 아무도 성육신 하나님의 직분을 대신할 수 없다. 다시 말해, 오직 말씀으로 된 하나님 육신의 이 정상 인성만이 신성의 역사를 발표할 수 있고, 그를 제외한 사람은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다. ……그에게 정상 인성이 있다고 하는 것은 그가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 된 것임을 증명하고, 그에게 정상인의 성장 과정이 있는 것은 그의 육신이 정상임을 더욱 증명한다. 게다가 그의 역사로 그가 ‘하나님의 말씀’이고, 또한 ‘하나님의 영’이 ‘육신’ 되었음을 충분히 실증할 수 있다. 사역의 필요로 하나님은 육신이 되었다. 다시 말해, 이번 사역은 반드시 육신에서 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정상 인성에서 해야 하는데, 이것이 바로 ‘말씀이 육신 되고’ ‘말씀이 육신에서 나타나는’ 전제이다. 이것은 두 차례 말씀이 육신 된 내막이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하나님이 거하고 있는 ‘육신’의 실질>에서 발췌

   『하나님이 어느 시대, 어느 곳에서 성육신하든, 그가 육신에서 역사하는 원칙은 변할 수 없다. 그는 말씀으로 된 육신이지만 또 육신을 벗어나서 역사할 수 없고, 더욱이 말씀이 육신 되었으나 또 육신의 정상 인성에서 역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 성육신은 의의가 없게 되고, 더욱이 ‘말씀’이 육신 된 의의가 조금도 없게 된다. 더구나 하나님이 성육신 된 것은 오직 하늘의 아버지(즉, 영)만 알고, 그 외는 육신 자신마저도 모르고 하늘의 사자도 모른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육신에서 하는 역사는 더욱 정상적이 되었고, 또한 확실히 ‘도’가 육신 된 것이고 ‘말씀’이 육신 된 것임을 더욱 나타낼 수 있으며, 그의 육신은 ‘정상적이고 평범한’ 사람임을 의미한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성육신의 심오한 비밀 (1)>에서 발췌

   『첫 번째로 성육신 된 하나님은 결코 성육신의 사역을 다 하지 않았다. 단지 육신이 해야 할 1단계 사역만 끝냈을 뿐이다. 그러므로 성육신의 사역을 다 하기 위해 하나님은 두 번째로 육신에 돌아와 육신의 모든 정상과 실제를 다 살아낸다. 즉, 하나님의 도를 가장 정상적이고 평범한 육신에서 나타내어 육신이 다 하지 못한 사역을 완성하는 것이다. 두 번째 성육신은 첫 번째 성육신의 실질과 같은 면이 있지만, 첫 번째 성육신보다 더 실제적이고 더 정상적이다. 그래서 두 번째 성육신이 받는 고난은 첫 번째 성육신이 받은 고난보다 훨씬 크다. 그러나 그런 고난은 육신의 직분으로 인해 있게 된 것이지 결코 패괴된 사람이 받아야 할 고난과는 같지 않다. 그 고난도 역시 육신의 정상과 실제로 인해 있게 된 것이다. 가장 정상적이고 실제적인 육신에서 직분을 하기 때문에 육신은 분명 많은 고난을 받게 된다. 육신이 정상적이고 실제적일수록 직분을 할 때 받는 고난은 더 크다. 하나님이 극히 평범한 육신에서 사역할 때에는 초자연적인 것이 전혀 없다. 육신이 정상인 데다가 또 사람을 구원하는 사역을 담당해야 하기 때문에 그가 받는 고난은 초자연적인 육신이 받는 고난보다 훨씬 큰 것이다. 그 고난은 다 육신의 실제와 정상으로 인해 있게 된 것이다. 두 차례 성육신 되어 직분을 하면서 받은 고난으로부터 성육신의 실질을 알 수 있다. 정상적인 육신일수록 사역을 담당하면서 받는 고난이 더 크고, 실제적인 육신이 사역을 담당할수록 사람의 관념이 더 깊어지고 감당해야 할 위험도 더 크다. 그러나 실제적인 육신일수록 정상 사람의 완전한 이지가 있고, 정상 사람의 필요가 있는 육신일수록 하나님이 육신에서 하는 사역을 더 잘 담당할 수 있다. 예수는 육신으로 십자가에 못 박혔고, 육신으로 속죄제가 되었다. 즉, 정상 인성이 있는 육신으로 사탄을 패배시키고, 사람을 십자가에서 완전히 구해 냈다. 두 번째의 성육신은 완전한 육신으로 정복 사역을 하고, 완전한 육신으로 사탄을 패배시킨다. 오직 육신이 완전히 정상적이고 실제적인 육신이라야 비로소 완전한 정복 사역을 할 수 있고, 힘 있는 증거를 해낼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사람을 정복하는 것은 육신에 있는 하나님의 실제와 정상으로 말미암아 효과에 도달하는 것이지 초자연적인 이적과 계시로 정복하는 것이 아니다. 이번에 말씀이 육신 된 하나님이 하는 직분은 단지 말씀을 하는 것이다. 말씀으로 사람을 정복하고, 사람을 온전케 한다. 즉, 영이 육신에 실제화된 사역은 바로 말씀을 하는 것이고 육신의 본직 사역은 바로 말씀을 하는 것인데, 이것으로 사람을 완전히 정복하고, 드러내고, 온전케 하고, 도태시키는 목적을 이룬다. 그래서 하나님이 육신에서 하는 사역은 정복 사역을 하는 과정에서 철저히 완전케 된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첫 번째의 구속 사역은 단지 성육신이 하는 시작 사역이었고, 정복 사역을 하는 육신이 비로소 성육신의 사역을 전부 보충하게 되었다. 성별에서 한 분은 남성이고 한 분은 여성이므로 말씀이 육신 된 의의를 완전케 하였다. 사람은 하나님에 대해 관념이 조금도 없게 되었는데, 즉 하나님은 남성이 될 수도 있고, 여성이 될 수도 있으며, 성육신 하나님의 실질은 성별의 구분이 없다. 그는 남자도 만들었고, 여자도 만들었으며, 그에게 있어서는 성별의 구분이 없다. 이 단계 사역에서 표적과 기사를 나타내지 않는 것은 말씀으로 효과에 도달하는 사역을 완성하기 위한 것이다. 다른 원인은 이번에 말씀이 육신 된 사역은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사람을 정복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이번에 말씀으로 된 하나님의 육신의 본능은 말씀하고 사람을 정복하는 것이지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 아니다. 그가 정상 인성에서 하는 사역은 표적을 나타내거나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 아니라 말씀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보기에 두 번째 말씀으로 된 육신이 첫 번째의 육신보다 훨씬 정상적이고, 또 하나님이 성육신 된 것은 틀림없지만 이번의 성육신은 예수의 성육신과 같지 않다고 여긴다. 비록 말씀이 육신 되었지만 완전히 같지는 않다고 여기는 것이다. 예수에게 정상 인성이 있고 보통 인성이 있었지만, 그에게는 또 많은 표적과 기사가 따르고 있었다. 그러나 이번의 성육신에게서는 사람의 육안으로 표적이나 기사는 볼 수 없다. 사람에게 병을 고쳐 주고 귀신을 쫓아내 준다든가, 바다 위를 걷는다든가, 40일 금식한다든가…… 그는 예수가 한 것과 같은 그런 사역을 하지 않는다. 이는 그의 육신의 실질이 예수와 달라서가 아니라 그의 직분이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사역을 허물거나 방해하지 않는다. 실제적인 말씀으로 정복하는 이상, 표적으로 사람을 굴복시키지 않는다. 그래서 이 단계는 성육신의 사역을 완전케 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한다. 오늘날, 네가 본 육신에 거하는 하나님은 아주 완전한 육신이어서 초자연적인 것은 조금도 없다. 다른 사람에게 질병이 있으면 그에게도 역시 질병이 있고, 다른 사람이 먹고 입으면 그도 역시 먹고 입으므로 아주 완전한 육신이다. 가령 이번에 말씀이 육신 되어 또 초자연적인 표적과 기사를 행하고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기도 하며 누구에게 죽으라고 했을 때 즉시 쓰러진다면 어떻게 정복 사역을 하겠는가? 또 어떻게 이방의 사역을 확장하겠는가? 사람에게 병을 고쳐 주고 귀신을 쫓아내 주는 것은 은혜시대의 사역이고 구속 사역의 시작 사역이다. 하나님이 사람을 십자가에서 구한 이상 더 이상 병 고치고 귀신 쫓는 사역은 하지 않는다. 만일 말세에 예수와 똑같은 ‘하나님’이 와서 사람에게 병을 고쳐 주고 귀신을 쫓아내 주며 사람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힌다면, 그런 ‘하나님’은 비록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과 같을지라도, 사람들이 모두 쉽게 받아들일지라도, 그 실질은 하나님의 영이 입은 육신이 아니라 악령이 입은 육신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역사하는 원칙은 한 번 하고 나면 영원히 중복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두 번째 성육신이 하는 사역은 첫 번째 성육신이 한 사역과 다르다고 하는 것이다. 말세에 하나님은 정복 사역을 평범하고 정상적인 육신에 실제화하였다. 그는 사람에게 병을 고쳐 주지 않고, 사람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지도 않으며, 다만 육신에서 말씀하고 사람을 정복할 뿐이다. 이런 육신이야말로 말씀으로 된 하나님의 육신이고, 이런 육신이라야 하나님이 육신에서 하는 사역을 완전케 할 수 있다.』

       <말씀이 육신으로 나타남ㆍ하나님이 거하고 있는 ‘육신’의 실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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