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심판과 형벌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타남을 보다

2019. 6. 16. 06:37전능하신 하나님 교회 동영상/말씀낭송 영상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속에서 하나님의 나타남을 보았



   주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수많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성경의 율법과 계명을 지키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풍부한 은혜를 누리며,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예배하고 기도하고 찬양하며 섬기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은 다 주님의 보살핌과 보호 아래에서 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자주 연약해지기도 하고 또 자주 강건해지기도 하면서 모든 행위는 다 주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라고 여기고 있었고 두말할 필요 없이 우리는 또 천부의 뜻대로 행하는 길을 이미 걷고 있다고 스스로 여기예수의 재림을 간절히 바라며고 있었다. 주 , 주 예수의 영광이 임하기를 간절히 바라며, 땅에서의 생활이 끝나기를 간절히 바라고 하나님 나라가 나타나기를 간절히 바라며, 모든 것이 ≪계시록≫에 예언한 것처럼 ‘주님이 오실 때 재난을 가져오고 상선벌악(賞善罰惡)하며, 그를 따르는, 그의 돌아옴을 영접하는 모든 사람들을 공중에 끌어올려 주님과 만나게 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언제나 이런 것을 생각하기만 하면 마음은 감개무량하였고, 자신이 말세에 태어나 운 좋게 주의 강림을 볼 수 있게 된다고 다행스러워하였다. 비록 박해는 당하지만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을 바꿔 올 수 있으니 이 얼마나 큰 ㄹ복인가! 이 모든 간절한 바람과 주님이 베풀어 준 은혜는 우리로 하여금 항상 깨어서 기도하고 다그쳐 예배하게 하였다. 혹시 내년에, 혹시 내일에, 또 혹시 더욱 빠른, 사람이 예상치도 못한 때에 주님이 홀연히 강림하여 그를 절박하게 기다리는 한 무리 사람들 가운데 나타날지도 모른다. 우리는 앞다투며 누구도 뒤떨어지려 하지 않았는데, 이는 주님의 나타남을 제일 먼저 보는 자가 되기 위해서였고, 주님께 들림받는 자 중의 하나가 되기 위해서였다. 이날의 도래를 위하여 우리는 모든 것을 다 화비(역주: 헌신, 소비)해도 조금도 아까워하지 않았다. 어떤 이는 직장을 그만두었고, 어떤 이는 가정을 버렸으며, 어떤 이는 혼인을 포기하였고, 심지어 어떤 이는 모아 둔 돈을 다 바쳤다. 얼마나 사심 없는 봉헌인가! 이러한 진지함과 성실함, 이러한 충심은 틀림없이 역대 성도들도 미치지 못할 것이다! 주님은 은총을 베풀고 싶은 자에게 은총을 베풀고 긍휼히 여기고 싶은 자를 긍휼히 여기기 때문에 우리의 이러한 봉헌과 화비는 주님이 이미 눈에 담아 두었으리라 믿었다. 우리의 간절한 기도도 이미 주님의 귀에 상달되었으니 주님이 우리의 봉헌에 보답해 주실 것이라 믿었다. 더군다나 창세전부터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총을 베푸셨으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는 복과 약속은 그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는 것이었다. 우리는 모두 장래를 계획하면서 당연하게 자신의 봉헌과 화비를 공중에 들림받아 주님과 만나는 조건과 자본으로 삼고 더욱이 서슴없이 자신을 장래의 보좌에 올려놓았는데, 만국만민을 다스리든, 왕이 되어 권력을 잡든 모두 당연한 일이고 역시 예상하던 일이었다.


   우리는 주 예수와 적대되는 모든 사람을 멸시한다. 그들의 결말은 장차 다 훼멸되는 것이다. 누가 그들더러 주 예수가 구세주임을 믿지 말라 하였는가? 물론 때로는 주 예수를 본받아 세상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기도 하면서 그들이 모르기 때문에 우리는 마땅히 그들을 너그럽게 받아들이고 용서해야 하였다. 우리는 모두 성경의 말씀에 따라 행동하였는데, 무릇 성경과 어긋나는 것이면 이단이고 사교라는 이런 신념이 각 사람의 마음속에 깊이 뿌리박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리의 주님은 성경에 있기 때문에 성경을 떠나지 않으면 주님을 떠나지 않는 것이다. 이 원칙을 잘 지킨다면 우리는 구원얻을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서로 격려하고 서로 부축하였고, 예배 때마다 우리의 모든 말과 행동이 주님의 뜻에 맞고 주님께 열납(悅納)되기를 바랐다. 비록 상황은 아주 열악했지만 우리의 마음은 기쁨으로 충만하였다. 손을 내밀기만 하면 얻을 수 있는 복을 생각하면 우리가 무엇인들 내려놓지 못하겠는가! 우리에게 더 이상 무슨 미련이 있겠는가! 이 모든 것은 다 말이 필요 없었고 모든 것은 또 다 하나님의 눈이 감찰하고 있었다. 거름 더미에서 들림받은 우리 이 극소수의 궁핍한 사람들은 주 예수를 따르는 모든 보통 사람들처럼, 들림받는 꿈을 꾸고 복받는 꿈을 꾸며 만국을 다스리는 꿈을 꾸고 있었다. 우리의 패괴(역주: 부패, 타락)는 하나님의 눈에 여지없이 드러났고, 우리의 욕망과 탐욕은 하나님의 눈에 정죄되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그토록 정상적이고도 그토록 이치에 맞게 자연스레 발생하여 우리의 간절한 바람이 맞는지를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우리가 지키고 있는 이 모든 것의 정확성을 의심하는 사람은 더욱 없었다. 그 누가 또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 수 있겠는가! 사람이 도대체 어떤 길을 걷고 있는지를 우리는 구할 줄 몰랐고 탐구할 줄도 몰랐으며 더욱이 물어보고자 하는 관심도 없었다. 왜냐하면 우리는 오직 우리가 들림받을 수 있는지, 축복받을 수 있는지, 천국에 우리의 자리가 있는지, 생명수와 생명나무의 열매에 우리의 몫이 있는지에만 관심을 가지면 되기 때문이었다. 주를 믿는 것과 주를 따르는 자가 되는 것은 바로 이런 것들을 얻기 위해서가 아닌가? 우리의 죄는 이미 사함받았고, 우리는 이미 회개도 하였으며, 쓴잔을 마셨고 십자가도 졌다. 어느 누가 우리의 대가가 주님께 열납되지 않는다고 할 수 있겠는가! 어느 누가 우리가 충분한 기름을 예비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미련한 처녀가 되기를 원치 않았고, 버림받는 자 중의 하나가 되기도 원치 않았기에 항상 주님께 기도하여 거짓 그리스도에게 미혹되지 않도록 보호해 달라고 구하였다. 이는 성경에서 “그 때에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혹 저기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마태복음 24:23~24)고 했기 때문이다. 이런 성경 구절을 우리는 모두 마음속에 깊이 새겼고 거꾸로도 줄줄 외우면서 그것을 더없이 귀한 보배로 여기고 생명으로 여겼으며, 구원을 얻을 수 있는지, 들림받을 수 있는지의 근거로도 삼았다……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타남을 보다



   수천 년 이래, 살아 있던 사람들이 떠나면서 소망을 가져갔고 꿈도 가져갔는데 천국으로 갔는지는 아무도 분명히 모른다. 죽었던 사람들이 다시 와서 예전에 일어났던 일들을 잊고 여전히 앞사람의 가르침과 앞사람의 길을 따르고 있다. 이렇게 날이 가고 해가 가도 우리의 주 예수, 우리의 하나님이 과연 우리가 행한 이 모든 것을 정말 열납할는지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우리는 단지 하나의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고, 장차 벌어질 모든 것을 추측하고 있었을 뿐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줄곧 침묵하며, 여태껏 우리에게 나타나지 않았고 우리에게 말씀하지도 않았다. 우리는 제멋대로 성경에 따라, 표적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마음과 하나님의 성품을 판단하였다. 우리는 하나님의 침묵에 익숙해졌으며, 우리의 사유 방식으로 우리 행위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데에 익숙해졌으며, 우리의 지식과 관념, 도덕 윤리로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를 대체하는 데에 익숙해졌으며,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는 데에 익숙해졌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수시로의 도움이 되는 데에 익숙해졌으며, 모든 일에서 하나님께 손 내밀어 요구하고 하나님을 오라 가라 하는 데에 익숙해졌으며, 또 성령이 어떻게 인도하는지를 개의치 않아도 된다고 하면서 규례를 지키는 데에 익숙해졌으며, 더욱이 자기가 자신의 주인이 되는 날들에 익숙해졌다. 우리는 서로 전혀 만난 적이 없는 이런 하나님을 믿고 있었다. 그의 성품이 어떠한지, 그의 소유소시(所有所是)가 무엇인지, 그의 형상이 어떠한지, 그가 오면 우리가 그를 알아볼 수 있는지 등등 이러한 것들은 다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우리 마음속에 그가 계시고, 우리가 모두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다. 우리는 그가 어떠어떠하다고 상상하기만 하면 충분하였다. 우리는 우리의 신앙을 감상하고, 우리의 영적인 것들을 귀하게 여기며 만사를 분토로 여기고 만유를 발 아래에 밟고 있었다. 왜냐하면 우리는 영광스러운 주님의 신도들이기에 설령 천산만수(千山萬水)와 온갖 위험과 어려움이 있다 하더라도 주님을 따르는 우리의 발걸음을 가로막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매번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이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에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 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 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 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그의 얼굴을 볼터이요 그의 이름도 저희 이마에 있으리라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데 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저희에게 비취심이라 저희가 세세토록 왕노릇하리로다”(계시록 22:1~5) 이 노래를 부를 때마다 우리의 마음은 한없는 기쁨과 만족으로 넘쳐났으며,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주님의 택하심에 감사드리고 주님의 은총에 감사드립니다. 우리로 하여금 금생에 백배를 얻게 하고 내세에 영생을 얻게 해 주셨으니 만약 지금 우리에게 죽으라 해도 절대로 조금도 원망하지 않겠습니다. 주여! 빨리 오소서! 우리가 당신을 간절히 바라는 걸 봐서라도, 우리가 당신을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린 걸 봐서라도 더 이상 일분일초도 지체하지 마옵소서!’


   하나님은 침묵을 지키고 우리에게 나타나지도 않았지만 그의 사역은 지금까지 멈춘 적이 없다. 그는 온 땅을 감찰하고 만유를 주관하며 사람의 일언일행, 일거일동을 친히 보고 있다. 그는 계획 있게, 절차 있게 그의 경영을 진행하고 있다. 아무런 소리도 없이 조용하고, 천지가 진동하는 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그의 발걸음은 한 걸음씩 인류에게 다가와 번개처럼 신속히 우주 가운데 그의 심판대를 펼쳤고 그의 보좌도 곧이어 우리 가운데 임하였다. 그것은 얼마나 위엄 있는 장면인가! 그것은 얼마나 장엄하고 엄숙한 광경인가! 그 영은 마치 비둘기처럼 또 포효하는 사자처럼 우리 가운데 임하였다. 그는 지혜이고 그는 공의이고 위엄이며, 권병(역주: 권세)을 지니고 자비와 긍휼을 만재(滿載)하고 조용히 우리 가운데 강림하였다. 그가 오신 것을 알아차리는 사람이 없었고 그가 오신 것을 영접하는 사람이 없었으며, 더욱이 그가 하려는 모든 것을 아는 사람도 없었다. 사람의 생활은 평상시와 다름없이 평소의 마음, 평소의 세월이다. 하나님도 보통 사람과 마찬가지로 가장 작은 따르는 자로서, 평범한 신자로서 우리 가운데서 생활하고 있다. 그에게는 자신의 추구와 목표가 있고 더욱이 보통 사람에게 없는 신성도 있다. 아무도 그의 신성의 존재를 주의하지 못하였고, 또 아무도 그의 실질이 사람과 구별이 있음도 알아차리지 못하였다. 우리는 그와 함께 생활하면서도 전혀 구애받지 않았고 두려워하지도 않았다. 왜냐하면 그가 우리 눈에는 다만 작디작은 신자에 불과하였기 때문이었다.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은 모두 그의 눈앞에 있었고, 우리의 마음과 생각은 모두 그의 앞에서 여지없이 드러났다. 아무도 그의 존재에 관심을 두지 않았고, 아무도 그가 하는 기능에 대해 그 어떤 상상도 하지 않았으며, 더욱이 아무도 그의 신분에 대해 그 어떤 추측과 의심도 가지지 않았다. 우리는 다만 우리의 추구를 계속할 뿐이었다. 마치 그와 아무런 상관도 없는 것처럼……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