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애로운 어머니 같은 하나님의 그 마음을 어느 누가알랴

2019. 5. 12. 19:01전능하신 하나님 교회 복음 간증/구원받은 간증

누가 자애로운 어머니 같은 [하나님의 마음]을 알랴

   이전에, 저는 ‘하나님은 공의로운 분이시다.라는 이 방면의 진리에 대해 치우치고 그릇된 인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람이 사역을 하면서 ①패괴가 흘러나오거나 과오를 얼마 저질러 교회의 사역에 손해를 입혔다면, 응분의 처벌을 받아야 마땅하므로 ②본분을 하지 못하게 되거나 징벌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공의라고 여긴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런 잘못된 인식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사역에서 실수를 저질러 본분을 하지 못하게 될까 봐 늘 걱정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는 ‘교묘한’ 방법을 하나 생각해 냈습니다. ‘어떤 일을 잘못했을 때는 되도록 인솔자가 모르게 하고, 온 힘을 다해 스스로 잘못된 부분을 보완하면 본분을 계속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때부터 저는 사역을 종합하여 보고할 때마다 ‘큰 문제는 작게 만들고, 작은 문제는 없앤다’는 식으로 일을 처리했습니다. 소극적이 될 때가 있어도 인솔자 앞에서는 극력 덮어 감추면서 아주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척했는데, 그것은 제가 맡은 본분을 감당하지 못해 인솔자가 다시는 저에게 일을 맡기지 않을까 봐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 저는 무슨 일을 하든 항상 조심조심하면서 인솔자를 경계했습니다.

자애로운 어머니 같은 하나님의 그 마음을 어느 누가알랴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과 폐부를 감찰하는 분이십니다. 저의 ‘뛰어난 수단’은 하나님의 눈길을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저는 자신이 감추고 싶어 하는 것일수록 하나님이 빛 속에서 드러나게 하신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제가 인솔자 앞에서 자신의 ‘재능’을 나타내려고 할 때마다 늘 추태를 보이며 실수를 하게 되었고, 제가 소극적인 상태를 덮어 감추려고 할 때면 늘 저도 모르게 얼굴에 ‘어두운 구름’이 드리워져 형제자매들에게 들키곤 했으며, 제가 사역에서 대충대충 한 것을 덮어 감추려고 할 때면 효과라는 거울로 모든 것을 다 드러내곤 하셨습니다… 그렇게 여러 차례 난감함을 겪고 또 진솔하지 못함으로 인한 양심의 가책에 시달리다가 저는 결국 엎드러지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 가운데서 그렇게 역사하는 하나님의 뜻과 목적을 깨닫지 못했고, 하나님께서 어떻게 사람을 구원하시는지에 대해서도 깨닫지 못했으며, 그저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 곧 교회의 처분을 소극적으로 기다리기만 했습니다.

   그러나 실제는 제 예상대로 전개되지 않았습니다. 비록 제가 사역 방면에서 본분을 잘하지 못해 책망과 훈계를 받기는 했지만, 형제자매들의 세심한 도움으로 어떻게 하는 것이 대충대충 하는 것이고, 어떻게 하는 것이 충심으로 본분을 하는 것인지를 알게 되었고, 오직 하나님의 요구대로 해야만 본분을 잘할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생명 진입 방면에서는 여러 차례나 사악한 생각에 빠져 벗어날 힘이 없었습니다. 그로 인해 고통스럽고 견디기 어려워 마음을 털어놓고 찾고 구하면서 교통하고 싶었으나 제 모습이 너무나도 추하여 차마 입을 열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결국 흑암 속에 빠져 성령의 역사를 잃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모든 것을 내던지고 실상을 드러내니 형제자매들이 저를 비웃거나 업신여기기는커녕, 오히려 저를 도와주고 권면해 주었습니다. 그로 인해 저는 빛 속에서 살게 되었고, 실행 길이 생겼으며, 또한 죄를 이길 힘도 얻게 되었습니다. 나중에, 저는 주변의 형제자매들이 무슨 일을 잘못했거나 패괴가 흘러나왔을 때, 교회에서 그것을 문제 삼아 직접 그들을 집에 돌려보내는 것이 아니라 최선을 다해 교통해 주고 돌봐 주면서 여러 번 기회를 주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집으로 돌려보낸 사람이 극소수 있었다고 해도, 하나님의 성품을 여러 번 거스른 데다가 아무리 훈계하고, 책망하고, 교통해 줘도 회개하지 않으니 집으로 돌려보낸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일지라도 교회에서는 여전히 회개하고 각성하기를 기다렸으며, 한동안 시간이 지난 뒤 진정으로 반성하고 변화되는 모습이 있다면 또 훈련받고 선행을 예비할 기회를 주었던 것입니다. 이런 사실에서 저는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는 마치 부모가 돌아온 탕자를 대하는 것과 같아 그 사랑의 깊이는 그 무엇에도 비할 수 없다는 것을 보게 되었고, 하나님께서 하시는 사역은 사람을 구원하고, 변화시키고, 온전케 하는 사역임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때에야 저는 자신이 ‘하나님의 공의’를 너무 치우치고 그릇되게 인식해 사실과 차이가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비록 하나님의 성품이 공의라고 하지만, 하나님은 그분을 따르는 사람에게 크나큰 인내와 관용, 긍휼을 가장 많이 나타내셨습니다. 하나님이 나타내신 사랑은 그분의 공의를 능가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그 순간 저도 모르게 하나님의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좌담 기록≫을 펼치고 그 말씀을 찾아보았는데,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실질은 무엇이냐? 그리스도의 실질은 사람에게는 사랑이다. 그를 따르는 사람에게는 한량없는 사랑이다. 그에게 사랑과 긍휼이 없다면 사람이 오늘날까지 따를 수 없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께는 공의도 있잖아요?”라고 말하는데, 그렇다! 그에게 또 공의가 있는 것은 틀림없다. 하지만 그의 성품을 놓고 말하면 그에게 공의가 있는 것은 인류의 패괴와 사악함을 미워하기 때문이다. 그에게 공의만 있고 사랑이 없다면 어떻겠느냐? 사랑이 공의를 이기지 못한다면 어떻겠느냐? 그러면 사람은 다 끝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너희에게 사실대로 말하는데, 하나님이 성육신 된 기간에 인류에게 한 사역에서 가장 뚜렷하고 가장 두드러진 실질은 사랑이고 한량없는 관용이다. 사랑이 아니라 너희가 상상한 것처럼 하나님이 사람을 격살한다면, 격살한다는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격살하고, 사람을 미워한다는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징벌하고 저주하고 심판하고 형벌할 것인데, 그러면 얼마나 엄하겠느냐! 만일 사람에게 노한다면 사람은 모두 무서워 벌벌 떨며 하나님의 눈앞에 서 있지도 못할 것이다 … 이것은 하나님의 성품을 발표하는 한 가지 방식일 뿐, 최종 목적은 그래도 구원하는 것이다. 그의 사랑은 모든 성품에 걸쳐 유로(역주: 흘러나옴)되고 있다. 너희는 회상해 보아라, 말씀이 육신 된 기간에 역사하면서 사람에게 가장 많이 유로한 것은 사랑이다. 인내는 무엇이냐? 인내도 그 안에 사랑이 있기에 긍휼히 여기는 것인데, 여전히 사람을 구원하기 위한 것이다. 하나님께 사랑이 있기에 사람을 긍휼히 여기는 것이다. 마치 부부간에 진정한 사랑이 있는 것과 같다. 상대방에게 결함이나 허물이 있어도 덮어 감추고, 화나게 했을 때도 인내할 수 있는데, 모든 것은 다 사랑의 기초 위에 세워진 것이다. 만약 미워한다면 그런 태도를 보이지 않을 것이고 그런 유로도 나오지 않을 것이며 그런 효과도 없을 것이다. 만약 하나님께 미움과 노여움만 있고 심판과 형벌만 하여 거기에 사랑이 없다면 너희가 지금 보고 있는 이런 상황은 아닐 것이다. 그러면 너희에게 좋은 일이 없을 텐데, 계속 너희에게 진리를 공급해 주겠느냐?』(<그리스도의 좌담 기록ㆍ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진실한 사랑>에서 발췌)……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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